2014년 봄에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무사히 그 계절을 건너올 수 있었던 이유는, 그저 내가 우연히 어떤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었다. 같은 날 다음 해에는 커튼을 모두 쳐서 교실을 어둡게 만든 후에 작년 봄까지는 분명 있었던 사람들의 추모 영상을 함께 시청했다. 그날은 같은 반 애의 생일이었는데, 그 애는 자기 생일에 이게 뭐냐며 울었다. 나는 생각했다. ‘그래, 이게 다 뭐지?’ 나도 영상이 시작될 때부터 울고 싶었다.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. 울 이유가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. 내가 울어서는 안 된다고. 나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, 미안했고. 나는 구해지지도 못할 것이다, 화가 났다. 그 두 문장을 노려봤다.
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,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다. 비행기를 타고 갔다. 그런데 왜인지 나에게는 비행기를 탄 기억이 없다. 나중에 친구가 보여준 사진을 보고서야, 비행기를 타고 갔고, 다시 돌아올 때는 비가 와서 우비도 썼다는 걸 알았다. 사진을 보기 전까지, 나는 내가 배를 타고 갔다고 기억하고 있었다.
어떤 기억은 나의 기억이 아니다. 하지만 나의 일부를 이룬다. 가끔 인간이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고, 더 가끔은 살아있다는 게 신비하다. 평균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었다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? 한 사람이 태어나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다는 건 1000년 전에도, 10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, 지금도, 여전히 기적이다.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. 나는 나와, 나와 같은 인간을 믿는다. 우리의 기억을. 과거, 현재, 미래를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신피질이 발달하며 생겼다고 한다. 그럼 나는 신피질을 믿는다.
나의 기억이 아닌 것이 나를 이룬다고 할 때, 지난 세기부터 오늘까지 재난의 기억을 살피는 일은 내 안에 다른 사람을 들이는 일과 같다. 나는 이들과 함께 좀 더 좋은 기억을 안고 만족할 만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으면 한다. 재난은 무관심과 망각을 동력으로 반복되므로. 부디 우리의 기억이 우리를 충분히 지켜주기를.
편집자 S |